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리폴리 전투 (문단 편집) === [[제1차 세계 대전]] 발발 === 1914년 6월 28일에 [[사라예보 사건]]이 터지고, [[대영제국]], [[프랑스 제3공화국]], [[러시아 제국]]은 [[독일 제국]] 등에 대항하여 [[제1차 세계 대전]]을 벌이고 있었다. 전쟁 발발 후 덴마크는 중립을 선언하고 카테가트 해협에 기뢰를 쏟아부어서 배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. 이 중립은 눈가리고 아웅에 가까웠는데, 독일 해군은 킬 군항에서 주력 함선들을 빼서 빌헬름스하펜에 옮겨둔 상태였고, [[킬 운하|그 이후의 이동도 그닥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]], [[유틀란트 해전]]을 치르는데 덴마크의 조치는 눈꼽만큼도 방해가 되지 않았던 것. 즉, 기뢰밭은 오로지 협상국에게만 불리했다.[* 이 조치는 나중에 덴마크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다. [[나치 독일]]이 [[노르웨이 침공]]을 하면서 덴마크를 먼저 접수해버렸고, [[크리스티안 10세]]는 이전 전쟁으로 사이가 나빠진 프랑스나 영국으로 도피한다는 선택지가 처음부터 없었다. 또한 영국은 이 경험으로 유럽의 중립국도 말만 중립국일 뿐이라고 느끼고, 주요 중립국에 대한 전시전략계획을 수립한 뒤 노르웨이 침공 당시 실제로 시행하게 된다.] 이제 영불 본토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바닷길은 레이더도 없던 시절의 위험천만한 북해항로와 지중해를 통한 흑해항로밖에 없었다. 이 흑해항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[[이스탄불|코스탄티니예]]를 지나야만 했기에 [[다르다넬스 해협]]과 오스만 제국의 선택이 전쟁의 향방을 정하게 되었다. 여기서 오스만은 중립을 선언한다. 나름대로는 자국의 국력이 유럽에 미치지 못하고 전쟁을 해봐야 이득 볼 거 없으므로 영리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모든 나라가 국력과 상관 없이 말과 글뿐인 약속만으로 코꿰이듯이 말려들어 대학살당한 전쟁이 [[제1차 세계 대전]]이고 21세기도 그닥 다를 바 없는게 외교의 현실인데, 거기서 이런 태도를 취했으니 오스만에 이것저것 퍼주던 관련 열강국들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. 한편, [[윈스턴 처칠]]은 [[사라예보 사건]] 직후에 전쟁을 예감해, 오스만이 구입한 전함 에린과 [[애진코트]] 두 척을 주지 않고 오스만을 압박했다.[* 자세한 내용은 [[애진코트]]와 [[http://ladenijoa.egloos.com/3925757|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과정]] 글을 읽어볼 것.] 이 불법압수조치는 8월 3일 영국의 선전포고 직전 실행됐으며, 오스만 대사의 본국 보고 조치는 바로 뒤따랐다. 독일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[[몰트케급]] [[순양전함]] '괴벤(SMS Göben)', [[경순양함]] '브레슬라우(SMS Breslau)' 함 두 척을 승조원과 함께 오스만에 양도하겠다고 하고, 이 두 척의 해군 함선이 [[이스탄불|코스탄티니예]]에 기항한다. 영국은 오스만에게 선택을 해 중립을 파기하라고 강하게 종용한다.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파디샤 [[메흐메트 5세]]는 중립을 표방했는데, 구체적으로는 독일군 전함의 주포가 내 궁전을 겨누고 있으니 양해를 바란다고 말했다. 이 발언은 진심이고 또한 사실이었으나 영국 입장에서는 변명으로 듣던 진담으로 듣던 간에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.[* 이때의 경험으로 [[튀르키예]] 공화국 성립 이후의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진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